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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솔) 난 엄마가 되었다

2016년 05월 17일 10:57

관리자 2016년 05월 17일 10:57 조회 6601 트위터 페이스북

난 엄마가 되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였다.

우울증으로인해 매일 술과 사는 나는 남편이 나에게 아이를 가져보도록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했었고, 시댁에서도 왜 소식이 없느냐고 재촉하곤 했다.

식을 올리기 전 시아버지에 대한 옛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은적이 있었다. 어느날 시어머니께서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 돌아오신 시아버지를 보고 왜 그리 술을 많이 잡수셨냐고 물어보자 “ 친구놈이 술판에 손자를 데리고와서 자랑을 하시기에 화가 나서 술을 잡수셨다고 한다”

우리 신랑은 8남매에 다섯째고 남자 순서로써는 3째이다. 큰형도 딸 셋, 둘째 형도 딸둘이 였다. 옛날 분들은 집안에 대가 끊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셨다. 시아버지께서는 나는 이제 손자도 못안아보고 저세상에 가나보다 라고 술기운에 말씀하셨다고 했다.

우리 전씨집은 이제 대가 끊어졌다고...

그애기들을 전해들은 나는 식도 올리지도 않았는데 아무생각없이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실한놈으로 낳아서 아버지 품에 안겨드릴께요” 했더니 아버지가 웃으셨다.

남편에 말에 따르기로 한 나는 남편손을 잡고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갔다.

하는이 무너지는 결과를 받았다. 다낭성 증후군이란 불임이였다. 눈 앞이 깜깜하고 다리에 힘이풀렸다. 한마디로 난소에 난포가 자라줘야하는데 자라지않는 배란장애라는 것이다.

원장은 의학적으로 아이를 갖는 방법이 있으니까 꾸준히 병원을 다니라고 말했다.

1년 반을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왔지만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난포에 약물을투여해서 난포를 키우기로한다. 부작용을 감수해야만 하는 선택이였다. 난소에 난포가 너무크면 복수가 찰수있는 부작용, 또 난포가 정상의 크기만큼 자라줘야하는데 자라다 말면 생리하듯 쏫아낸다고 했었다.

난 그 위험 부담을 안고 시술을 했다. 그런데 결과를 기다리는중 신랑이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고 만다. 움직일수가 없어서 모든건 내가 해줘야 했었다. 밥 먹이는 것부터 생리적인 현상을 다 받아내곤 했었다 신랑은 수술말고 자생한의원 치료방법을 선택해서 그 치료를 받았다. 사간도 오래걸리고 돈도 엄청깨졌다. 한번진료하는데 진료비만 10만원이 넘었고 약값이 80만원이였다. 약을 3번 해 먹었다. 남편 간호하는와중에 시술하고 배란이 되서 아기를 기다리는 중 실패를 했다. 배가 엄청나게 아프더니만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쏫아내고 쏫아냈다. 너무 무서웠다. 온몸에 식은땀과 공포감이 말도 못할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남편이 일어나는데만 집중했다. 남편은 완치가되서 다시 일할수 있었다. 남편은 시술한게 실패한걸알고 다시 한번 다른 방법을찿아보자고 했지만 난 싫다고 했다. 너무나 공포스러웠고 고통스러웠다. 그 무서움이 말로 표현할수없었다. 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직 남편은 젊고 성실하고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기에 어느 여자가 와도 잘 살수 있을것이다 하는 생각에 내가 손을 놔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절대 이혼은 안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애 없이도 괜찮다고 둘이 살자고 했었다. 시실 이혼에 찬성할까봐 두려웠다. 난 아이를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한쪽마음엔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모른척 했다. 우연하게 참숯가마에 다니면 아이가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 젊은여자가 아이를 못가져서 참숯가마에 불을 몸으로 받으니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

그것도 자식을 넷이나낳았다고 한다. 귀가 솔깃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참 숯가마가 생각이 나서 남편에게 가장가까운 참숯가마를 찿아달라고 했다.

남편은 찿아서 나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찜질을 너무좋아하는 나는 그곳에 완전 흠뻑 빠진다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그곳에 왔다갔다 했었다. 아침에가서 신랑이 퇴근전에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생리불순이 심했던 나는 생리불순이 없어진다. 너무나 신기해서 더 열심히 다녔다. 그런대 아니나 다를까 생리를 안하는 것이다 실망스러웠다.

그럼 그렇지 하고 또 생리블순이 또 다시 오나보다했다.

신랑이 사준쿠폰이 너무 많이 남아있기에 아까워서 다니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머리만 잘라낸 김치를 쭈~욱 찢어서 실컷먹고 싶은거다.

집에와서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꺼냈다. 김치 머리만 잘라내고 그 자리에서 먹고싶은 만큼 실컷 김치를 찢어 먹었다. 실컷먹고나니 이상했다.

신랑은 항상 달마다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아침에 출근할때 머리위에 올려놓고나가곤 했었다. 처음에 매번 확인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것 조차도 짜증이고 스트레스였다.

남편이 사다준 테스트기를 하지안고 서랍에 넣어둔테스트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해본결과 난생 처음보는 빨간색 두줄이였다. 믿어지지가 안아서 또하나 꺼내서 또 해봤다. 역시 빨간색 두줄이였다. 두 개의 테스트기를 가슴에 안고 방으로들어와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신랑한테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우리 신랑 난리가 났다. 그런데 그날 업무가 많아서 병원을 그다음날에갔다. 세상에 10주였다. 2달 반동안 아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3개월이면 아이의 형태가 다 자란다고 한다. 근데 우리 아이는 10주만에 아이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신랑은 밖에서 모니터 속의 아기를 보고 나는 안에 아이를 보면서 울고....

그렇게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아기를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생활을 해 나간다. 지금것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할수 있는가 싶었다

사내라서 그런지 우리 아이의 태동 때문에 잠못 이룬적도 많았다. 건강하게 뱃속에서 키워서 아이를 만날날만 기다렸다 예정일보다 늦어지더니 드디어 아기가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배가 아파오고 있었다. 진통이 시작 되었다. 난 3일을 진통을 하면서 결국엔 수술을 했다. 진통이 찿아 올때마다 친정엄마가 생각이 났다. 더 미웠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아프게 낳아놓고 버릴수 있는지 화가나서 참을수가 없었다.

원장이고 신랑이고 수술하자고 계속 말렸지만 난 꼭 순산 할꺼라고 말했다. 결국엔 아이가 위험하다는 소리에 3일만에 진통을 끝내고 난 수술실로 들어가 선생님 도움으로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골반이 열리지 안아서 아이가 많이 힘들어 했다는 말에 한없이 미안했었다. 아이의 머리를 보니 엄마만나러 나올려고 지도 얼마나 애를 썻는지 머릿속 살이 벌게져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난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고 시부모님에게 큰 효도를 했다. 그렇게 아이를 낳아 집으로 데리고와 난 산후 우울증에 걸렸다. 낮에는 아이를 보고 저녁에는 신랑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슬을 마셨다.

그렇게 술병을 내려놓지 못하고 지금우리 아들이 4살인데 이제서 술을 끊어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또 내가 엄마를 미워했듯이 내 아이가 나를 알코올중독자 엄마로 보여지지 안기위해서 난 오늘 하루도 단주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것이다.

건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 파이팅 할것이다. 난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라는걸 느낀다.

아리솔,A.A 를 알게 된건 정말 나에겐 행운이다.

단 한번도 진심으로 단주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곳 아리솔에서는 건강한 정신의 단주 생활과 미처 나 자신을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면서 나 자신이 개선되어야 더 행복한 삷을 살아갈수 있겠구나 하는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했었다. 아들하나만 보내 달라고 기도 했었는데...

시아버지에게 사랑 많이 받으라고 아들을 보내주신것만 같다.

엄마가 되게해준 아들에게 고맙고 건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것이며 항상 용기 주시는 아리솔 선생님들에게 감사 드린다 참고로 나의 아들은 나의생일날 만났다.

그래서 영화같은 얘기지만 아들과 생일이같다.

사랑하는 아들!

맑은 정신과 건강한 엄마로써 우리 아들을 지켜줄게...

사랑해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