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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솔) 쩐의 전쟁이여 안녕.

2019년 06월 28일 10:01

관리자 2019년 06월 28일 10:01 조회 3404 트위터 페이스북

얼마전 용인 작은언니집에서 언니는 남편에게 어린시절 가족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속엔 그립고 눈물나는 아빠와 할머니가 계셨고,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나도 있었다.

나는 가난도 부유하지도 안은 단란한 가정에서 13녀의 막내로 부모님의 귀여움을 받았다.

아빠 등에업혀 일가신 엄마를 기다리고 부모님 가운데서 잠을 잤다.

학창시절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용돈을 벌고자 절친들과 부모님께 무릎꿇고 허락을 받아 주말만 주유소와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2년 동안 했다.

아마도 나의 험난한 쩐의 전쟁은 그때부터 였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20대는 풋풋하고 청순함과 거리가 멀고 IMF로 일용직 근로자이신 아빠는 일자리에 허덕였고 오빠는 대학 중간에 군대로 가고 큰언니 작은언니 역시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고 나는 한일은행 알바를 하다가 직장상사의 명의 도용금융사기로 5천여 만원의 빚을 선물을 받은체 빚 덤위에 앉았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빠와 가족들이 손수지은 집을 떠나 작은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 상황에 나는 빚을 가족에게는 숨긴체 취직했다며 지방으로 갔다.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먹지도 죽으려고도 하지않고 무슨자신감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갚기 시작했다. 주업무인 유치원,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를 본업으로 하며 여름에는 참외, 오이, 딸기, 야채 하우스에서 열사병도 걸리지 않고 주말에 일을 하고 가을에는 추수하는 트럭을 배달하고 그러다 요양보호사를 먼저따서 숙식을하며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눈치밥을 먹었고 겨울에 손발이 동상이 걸려 궁핍하고 비참한 내모습에 서러워 울기도 많이 했다.

그래도 돈을 갚겠다는 생각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렇게 내 나이 30대쯤 되서야 빚은 갚아갈때쯤 술에 의존을 하였다. 돈의 압박감과 검찰청조사 때문에 공황장애를 앓았고 수면제가 싫어 맥주한캔의 시작이였다.

빚 청산이 끝날때 쯤 나는 그 지긋지긋한 쩐의 전쟁터를 떠나와 수원 엄마집으로 오며 남편을 만났고 술, 담배를 안하는 짠돌이 남편을 만나 힘이 들었다. 짠돌이는 괜찮은데 술을 못먹어 짜증이 났다.

그리고 반복되는 임신과 유산으로 공황장애가 되살아나 술에 빠져들었다.

하루는 술병을 끓어안고 울면서 자는 나를 보던 남편의 뒷모습에대고 나 유산했잖아 이해도 못해쥐? ” 히며 울부짖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위대한 힘이 술이었나보다. 한심하고 어리석게도 남편은 나를 고치기 위해 이곳 공동체를 알아냈고 자신하고 이혼하지 않으려면 A.A에 나가라고 강요했다.

이혼할 용기도 없는 나는 알코올중독도 아닌데 왜 나를 불구덩이 속에넣는거야 이런사람들하고 뭐하라고? ” 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의 속마음에선 그 알량한 자존심과 수치심, 두려움에 똘똘뭉쳐있었다.

처음엔 남편손에 이끌려 A.A에 왔지만 평온함을 찾자 아리솔에 입단을 하고 깨달았다.

내가 틀렸다라고힘들고 괴로웠던 나의 과거는 남들이 하지 않았던 생고생을 미리 맛보았고 늦게라도 피는꽃이 있다며 알코올중독자임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공동체의 보호속에서 평온한 삶을 비로서 살아가본다. 나의 위대한 힘은 술도, 불구덩이 진흙탕속의 과거도 , 잃어버린 20대도 아닌 사진속의 햇살속에 푸르고 맑은 내 모습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본다.

나의 삐뚤어지고 어글어진 마음을 받아준 우리 A.A와 아리솔선생님들께 감사들이며 사랑하는 나의 남편에게 감사하며 이글을 마친다.